현대사진을 보는 눈 #2, 한정식

2024. 3. 26. 18:44review

 

 

 

 

11. 공간에서 시간으로

 

근대사진까지만 해도 시간이나 공간 자체에 대한 관심, 시간과 공간의 의미나 특성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시공간의 일치로서의 사건(event)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이 '사건'이란 시,공간의 합치점으로서의 철학적 이미지가 아니라 생활 단면을 보여주는 현실적 상황이다. 따라서 시,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리였고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근대사진에서의 '시간'이란 사진 형성의 외적 조건, 곧 공간 형성을 위한 부수적 요소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간보다 공간이 앞선 것이 근대사진으로, 시간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있었다면 사건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관심뿐이었다. 

현대사진은 공간에서 시간으로 인식이 우선하면서 시작되었다. 공간 형성의 부수적 요소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시간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말해서 시간 자체가 사진에서는 독자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음을, 시간은 시간이 형성하는 공간을 따로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때의 공간은 공간 자체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마치 근대사진에서의 시간처럼 독자적 의미는 가지지 못한 채 시간을 형상화시켜 주는 부수적 위치에 선다. 시간이 공간을 대동하지 않고 현실화, 시각화할 수 없기 때문에 공간이 사진에서 자취를 감출 수는 없다. 공간이 독자적 의미를 상실하였음을 뜻하는 것뿐인데, 공간이 독자적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은 근대사진의 주된 관심이었던 '사건'이 사진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뜻한다. 사건이 사라진 공간은 단순한 빛과 그림자의 형성, 곧 시간의 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사진에서 시간은 대체로 두 가지 면으로 영상 형성에 작용하고 있다.

첫째로, 시간의 외형적 형태를 들 수 있다.

흔들림(blur), 초점흐림(out of focus), 조립자 등은 외형적으로 영상에 움직임을 부여해 주는 시간의 자국이지만, 전통적 구도를 무시한 화면 구성,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화조(tone) 등은 사진에 생동감을 부여한 시간의 흔적이다. 초점흐림이나 조립자 또는 비정상적 구도, 화조 등이 직접적인 시간의 흔적은 아니지만, 현실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그 자체로 인식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그러한 요소들이 사진에서 시간성을 느끼게 해주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William Klein

 

 

둘째로, '결정적 순간'의 개별화에서 찾을 수 있다. 결정적 순간이 작가마다 다르게 설정되고 인식된다는 뜻이다. 근대사진에서의 '결정적 순간'은 '사건'을 형성해 주는 완벽한 시공간 인식이었다. 그러나 현대사진에서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극적 일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결정적 순간에 대한 감각이나 인식이 개별적이기 때문에 시공간의 극적일치를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시공간의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느껴지는 비현실적 영상이 그 주류를 이룬다 해도 좋을 정도이다. 특히 시간성이 분리되어 강조되고 있는 것이 현대사진이다.  애초에 분리되어 나타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무언가 모순되는 느낌이 든다.  공간적 실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시간이 독자성을 주장한다는 것부터가 우선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극적으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 '사건'의 클라이맥스로 삼고 있는 근대사진과 클라이맥스가 없는 아니 애초에 '사건'조차 없는 현대사진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연해진다.

ralph gibson(1939~)
lee friedlander(1934~)

 

garry winogrand(1928~)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개별화는 반드시 이런 긴장감만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엇갈림이 기묘하게 만나기도 한다. 리 프리들랜더(lee friendlander)의 사진에서 시간이 공간과 엇갈리기보다 조화롭게 만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만남이 현실적 사건 형성을 위한 정상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점에서 근대사진에서의 결정적 순간과의 차이를 보인다. 그의 사진에서 시간은 공간과 절묘하게 만나고 있기 때문에 얼른 보면 결정적 순간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기 쉽지만, 그런 평범한 일상이 기묘하게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사진의 결정적 순간과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그의 사진에서 시간은 공간을 사건화시키지 않고 이미지화시킨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문학적의미'의 '사건'이 아니라 시각으로밖에 전달이 되지 않는 '시각적 의미'의 이미지가 그의 사진의 주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형성해 주는 것이 그의 셔터 찬스로, 그의 셔터에 의해 지나가는 인물과 주변 사물이 기묘한 공간 배분으로 정지되는가 하면, 사물과 사물이 겹쳐짐으로써 시각적 위트를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기묘한 상황은 얼른 보아 타이밍과 무관한 것 같지만 실상 셔터 찬스가 만들어낸 공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프랜들랜더나 게리 위노그랜드 등의 사진이, 사진이 만들어내는 독자적 상황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가리킨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상황은 현실이면서도 현실적 의미가 배제된 상황이어서 사진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찍어 정복시킴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또 하나의 현실을, 프리들랜더는 일상의 별 것 아닌(또는 별 것 아니게 보이는) 풍경에서-현대사진의 전형으로서의 풍경, 아메리칸스트리트- 사진의 시각으로 잡아내어 왔다. 사진을 읽혀져야만 하는 미디어임을 우리들은 그를 통해 새삼스럽게 실감하였다."

 

결론적으로, 사진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사건만이 아니라 여러 형태로 형상 형성에 간섭하고, 그것이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시각적 의미를 전달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 현대사진이요, 현대사진의 시간인식이다.
 

 

 

12. 프레임의 의미 창조

 

 

사진영상 형성 과정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범위는 프레임을 정한 뒤 셔터를 누르는 일밖에 없다. 나머지는 광학적 공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표면상 아무것도 아닌 이 두가지가 사실은 사진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요인이다. ~~  사진의 시간이 셔터에 의해 결정된다면 사진의 공간은 프레임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공간 역시 셔터를 누름으로써 비로소 결정되기 때문에 사진에서는 셔터 행위가 사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셔터, 곧 시간성을 인식하고 활영한 것이 현대사진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관심을 가진 사물에 테두리를 씌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사물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이 프레임에 둘러싸여 나타났다면 그것은 적어도 작가가 어떤 의미를 제시하고자 했다는 뜻이 된다. 아무런 의미 없이 굳이 테두리를 씌워 보여줄 까닭이 없다.  중성적 사물에 어떤 뜻을 부여하는 작업, 그것이 프레임 씌우기이다. 곧 프레임을 씌운다는 것은 작가의 의식작용이요, 의지 실현 작업이다. 작가의 주관적 의지를 프레임을 통해 드러내는 행위, 그것이 프레이밍(Framing-따내기)이다. 프레임으로 둘러싼다는 것은 또한 주위 환경과의 분리를 뜻한다. 현실에서의 분리, 독립을 뜻한다. 테두리가 없는 현실에 테두리를 씌운다는 것부터가 그렇지만, 테두리를 씌워 불리시켜 놓았을 때, 그 분리, 독립된 영상이 현실의 한 부분일 수는 있어도 현실 그 자체일 수 없음은 누차 지적한 바 있다. 현실이라는 것이 부분적으로 잘라낼 수 있는 사물이 아닐 뿐더러 현실에서 분리된 부분적 현실이 현실 그대로일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사실과 현상은 분리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환경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관계를 나타냄으로써 인간과의 관계가 성립된다. 즉물적 사진처럼 물상의 단편이 고립되어서는 단순히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프레임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사진 이후였다. 사물을 부분적으로 절단하여 찍은 클로즈업 사진이 주로 근대사진 이후임을 생각해 보면 된다. 부분을 과감하게 절단한다는 것은 프레임을 통해 그 부분에 독자적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의식적 행위이다. 현대사진은 프레임에서의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다. 극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깨버리고 극적 사건, 아름다운 사물을 사진에서 추방해 버린 것이다. 프레임 자체를 의식해서 프레임에 현실을 따낼 때 그 때낸 현실이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운 경계가 프레임으로 바뀐 것이 현대사진의 프레임 의식이다. 

 

프리들랜더는 시간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프리들랜더의 시간성 공간 역시 프레임을 전제로 하고서의 일이다. 그레임을 벗겨 버리면 그러한 교모히 배분된 공간은 자정을 넘긴 신데렐라처럼 다시 누추하고 남루한 길거리 풍경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프레임의 절대성이 느껴지는 중요한 대목이다. ~~~ 이렇게 프래임 의식이 한걸음 더 내어딛을 때 우리는 현실과 거의 관련이 없는 환각에 빠지게 된다. 비몽사몽간의 혼란이 아니라 분명하게 현실을 떠난 미지의 세계에 바지게 되는 것이다. 동원된 현실은 단순한 소재로서 현실적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나타나고 있다. 전혀 엉뚱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진의 도 하나의 매력이요, 프레임이 현재사진에서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다. 

 

Martin Parr

 

 

현대사진의 최근세대로서 제3세대(프레들랜더, 위그노랜더가 2세대) 사진가들의 사진에서도 프레임은 절대적 위치에 놓인다. 이들 사진의 주목록인 불안-긴장-부조리 등등 이 모두 주위가 단절된 프레임을 통해 형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도 프레임을 풀어 놓으면 앞의 여러 경우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연출과 인위적 조작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3세대 작가의 사진은 최근의 소위 '만드는 사진'으로 알려진 구성사진 등의 신경향 사진과 그 맥을 같이한다. 구성사진이 회화적 접근 방법임에 비해 이들의 사진이 순수한 사진적 접근 방법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사진의 현실적 성격을 무시하고 사진적 이미지 형성을 위해 현실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의식구조라 할 수 있다.

 

선별된 상황에 프레임을  씌워 의미화시키는 것이 사진이라면, 무대야말로 생활에서 추출한 어떤 상황에 프레임을 씌워 의미화시키는 것으로, 그들은 무대 자체를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들은 현실 자체를 삶이 연출되고 있는 하나의 무대로 파악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13. 색채와 채색

 

 

현대사진은 한마디로 '느낌의 사진'이다. 대상의 외형적 묘사에서 대상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현대사진의 중요한 특성이다. 인상파적 색채 인식이란, 대상이 발하고 있는 색체를 감각적으로 소화하여 이를 대상 표현의 한 방법으로 전환시키는 색채 수용방법을 가리킨다. 과거의 사진이 대상의 색채를 객관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대상의 외형적 묘사에 그친 데 비해, 현대사진은 대상의 색채를 감각적으로 전환시켜 대상을 해석하고 정의한다. 색채의 감각적 건환이란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느낌'이다. 설명이나 묘사를 통한 색채 인식이 아니라 시각을 통한 색채의 직접적 체험인 것이다.  느낌이란 원래 주관적일 뿐 아니라 추상적이어서 표현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형태가 없는 감정을 구체적 형태로 전환시키다 보니 형태가 두드러져 외형적 형태 자체가 작가의 표현 목적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숨은 뜻을 찾아내지 못하고 지나치는 수도 있다. 

~~~

과거의 사진은 색체를 사물에 따른 부수적 현상으로만 다루었다. 색채가 가진 독자적 느낌이나 분위기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현대사진은 이들 색채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느낌 그대로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색채 자체가 감상의 대상이요, 표현의 목적으로 독립한 것, 이것이 뉴 컬러의 색채요. 현대사진의 색채 인식이다.

 

feanco fontana

 

 

14. 바뀌는 누드 사진

 

현대사진은 누드 사진엗 변화를 보이고 있는 바, 그 두드러진 현상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누드 사진의 사라짐이다.

누드 사진은 더 이상 누드만의 사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찰의 한 방법, 앞에서 지적했던 인물사진의 한 부류로 다루고 있다는 뜻이다. 인체를 통해서, 또는 성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는 한 수단이 된 것이다. 성을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적 인간성의 하나로 삼아 이를 관찰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를 굳이 누드 사진이라는 울타리를 씌워 따로 분리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전통적 누드사진과 그 개념이 달라지고 만 것이다.

둘째로, 성 자체에 대한 직접적 관심이다. 성을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그대로를 보연준다거나 성행위 자체를 보여줌도 주저하지 않는다. 성을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그대로 들여다보았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물음이요, 에로티시즘이 오히려 배제된, 차라리 과학적 객관성의 냉혹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남성누드의 등장을 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누드 사진은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이 오락화되고 향락산업의 도구로 되어 있는 실정에서 텔레비젼을 통해 안방에까지 벗는 문화가 침투한 마당에 벗은 인체에 대한 매력이나 관심은 그만큼 희박해진 것이 사실이다. 누드 사진이 한 장르로 남든 사라지든 성의 문제는 사진의 영원한 주제로 남아 여러가지 형태와 양식의 변화를 겪으면서 존속할 것이다. 성은 인류에게 씌워진 영원한 멍에요, 축복이기 때문이다.

 

 

 

15. 종말론의 엄숙한 간증

 

윌리엄 클라인과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이 현대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은 그들이 현대사진의 선두주자들인 때문인데, 그들이 현대사진 선두주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들 영상의 혁명성에서 온다. 즉 공론적, 객관적 기록 수단에서 개인적, 주관적 표현 수단으로의 전환이 이들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근대사진 시기까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소위 공론성을 바탕으로 하는 객관적 가치를 중시하여 비록 사진이 주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매체라고는 해도 주관이 객관성을 넘어 표면화하는 것을 꺼렸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주관성에 그들의 사진을 맡겼다. 애초에 주관적인 수밖에 없는 기록일 바에야 주관성에 철저한 것이 오히려 올바른 접근 방법이라는 뜻에서였다. 

 

한마디로, 근대사진이 성선설을 바탕을 한 긍정적 인생관의 사진이었다면 현대사진은 성악설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부정적 인간관의 사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부정적이라기보다 현대가 만들어낸 부정적 인간상에 대한 냉철한 관찰 기록이라 함이 보다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근대사진이 영상의 중성성을 믿으면서 엄격한 형식을 견지해 온 사진이었다면, 현대사진은 영상의 주관성을 중시하면서 형식을 벗어던진 자유 분방한 영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인간관은 현대사진에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학적 고찰의 결론으로서의 환경론과 철학적 고찰에서 얻어진 운명론이 그것이다. 전자가 '서구의 몰락'이 몰고 온 어두운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후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고찰에서 얻은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은 현대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본 자기 성찰의 영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만나는 같은 사진들이다. 사회적 고찰의 부정적 영상은 다이안 아버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버스의 사지은 부정적 현상을 긍정적 휴머니즘으로 감싸 순화시켜 놓은 근대적 영상과 달리, 상처투성이 알몸을 적나날하게 제시한 폭력성에 기인한다. 

 

Diane Arbus(1923-1971)

 

 

1955년 '인간가족'전이 인간 찬가의 화려한 잔치였다면, 1972년의 아버스전은 인간 부정의 우울한 장송곡이었다. 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의 성격을 단적으로 구별해 주는 어떤 기준을 이 두 전시가 각각 제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인간 관찰의 변모는 포트레이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근대사진의 경우, 포트레이트는 피사체가 되는 인물의 개성이나 인품 등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그 요체였다. 요제프 카쉬라든가 아놀드 뉴먼의 경우가 그랬다. 그러나 현대사진의 경우 우선 포트레이트를 따로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상적 인물사진이건 포트레이트건 그것이 사람을 찍은 사진이라는 점에서 같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사진까지만 해도 일상적 인물사진은 환경 속에서의 인물의 의미를 스냅을 통해 생각해 봄으로써 실내에서 우아한 연출을 곁들여 개성과 인품을 추구하는 포트레이트와 구분되었던 것인데, 현대로 들어와 인물의 관찰이 내면화하면서 일상적 인물사진과 포트레이트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하기야 내면적 관찰이 그 공통 목표일 때 두 사진이 공통적 외형을 갖게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를 일상적 인물사진의 소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일상적 인물사진에서도 정공법적 정면성의 사진이 많이 등장하면서 포트레이트와 구별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꺼꾸로, 포트레이트의 소멸이라고 해도 관계가 없을 것이다. 현대적 포트레이트 양식을 따로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두 개의 양식이 현대에 와서 완전히 화학적 융합을 이루었다. 

 

근대사진이 도시의 사진, 사회의 사진이라고 한다면, 현대사진은 인간의 사진, 내면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진이 외향적 인간 관찰의 사진이고, 인간을 사회화의 관계 속에서 파악한 사진이었다면 현대사진은 내향적 사진으로, 사회와의 절연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사진이다. 근대사진이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사진이라면, 현대사진은 자의식의 동국 속에 파묻혀 자기혐오, 자기학대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자기반성이나 성찰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기 구제에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해도, 또는 그럴수록 드러난 자기 모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부정은 보다 강한 부정으로 상승작용을 한다. 근대사진이 긍정적이고 건강한 데 비해 현대사진이 부정적이고 병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윌리엄 클라인과 로버트 프랭크에서 출발한 자기 성찰의 영상이 아버스의 불면증을 거쳐 자기학대의 발작으로 증폭된 위트킨의 사진에 이르는 과정은 그대로 현대사진의 인간관찰 과정이다.

 

Joel Peter Witkin, 1939~

 

 

이러한 인간 관찰의 비극성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예술 지향의 순수사진과의 간격을 좁혀 주었다. 다시 말해서 다큐멘터리 사진과 주관적, 창작적 사진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사진 현실이다. 이는 다큐멘터리의 개성화, 내면화에서 오는 것으로, 대사회적 관심이 그 구조적 모순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삶의 질에 대한 거스로 바뀐 데에서 온, 다큐멘터리의 내면적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Alex Webb, 1952~

 

 

 

16. 잃어버린 자연

 

 

현대사진이 모두 인물사진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현대 풍경사진의 실상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대적 사고나 감각에 알맞은 형태로 바뀌어 있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풍경사진의 현대적 변모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소위 '심상 풍경'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심상 풍경'이란 작가의 삼상이 투영된 풍경이란 말로, 풍경 자체보다 작가의 내면에 중점이 두어진 풍경사진을 가리킨다. 

전통적 풍경 사진은 우선 소재 자체가 풍경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풍경을 사진가가 가장 좋은 상태에서 가장 알맞은 프레임으로 따내는 것, 이것이 전통적 또는 근대사진까지의 풍경사진이었다. 그러나 현대사진에서의 심상적 풍경은 풍경 자체의 현실적 의미나 가치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소재가 무엇이든 작가의 내면과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때 이를 취한다. 아름다운 풍경이든, 보잘것없는 풍경이든, 풍경이 문제가 아니라 종래의 가치 기준에서 풍경으로 다룰 수 없었던 소재, 이를테면 구두짝도 관계없고 쓰레기통이라고 해서 피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상의 현실적 의미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현실적 가치나 의미를 전도시킬 때 생기는 기묘한 쾌감 같은 것을 즐기기도 한다. 

 

 

 

 

17. 현대사진의 특성

 

 

근대사진은 시대적 성격상 무엇보다도 회화에서 벗어나 사진 독자적 존재의의와 가치 추구를 그 이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사진은 이러한 일체의 제약을 거부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것은 작품 제작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는 기준이 달라지고 사물을 느끼는 감각이 바뀐 때문으로, 기존의 시각이나 기법으로는 새로운 의식, 새로운 감각을 수용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현대사진'에 나타난 현대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첫째, 공간성에서 시간성으로.

현대사진은 사진이 단순히 어떤 상황이나 사건의 기록에만 머물기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가진 매체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우선적으로 시간이 만들어내는 영상미에 주목을 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이 시간성을 현실을 보다 현실적 영상으로 만들어 주는 장치이기도 했다. 공간성이 그 어휘에서도 느껴지듯 회화성과의 짙은 연관 아래에서의 화면 구성 원리였다고 한다면, 시간성은 움직임과 연관되는, 영상성으로 이어지는 접근 방법이다. 

 

둘째, 외형적 기록에서 내면적 창조의 세계로의 심화.

한마디로, 묘사에서 표현으로 기능적 확장을 들 수 있다. 사진의 대상을 밖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고 있다는 뜻이다. 사진이 제작되는 목적이 현실의 기록, 재현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고백이요 창조인 것이다. 대상은 오로지 자기 표현의 도구일 뿐 대상 자체의 현실적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현실의 기록의 수단이었던 사진이 이제 거꾸로 현실을 영상 창조의 도구로 전이시켜 놓은 것이다. 주객의 전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상을 대하는 사고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셋째로, 휴모니즘의 소멸,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와 함께 휴머니즘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값싼 감상주의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며, 있는 사실을 윤색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관찰하는 태도를 뜻하는 것이다. 사실 그대로 관찰한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객관적 접근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객관적이랄 수도 있지만 근대사진의 객관성이 어느 쪽에서도 치우치지 않음으로써 어느 쪽도 불이익을 보지 않게 하겠다는 조심성에 비해, 현대사진은 방임적이라고 할 정도로 작가의 입장은 냉혹하다. 따라서 그 결과나 영향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그 결과에 상당히 신경을 쓰던 근대사진과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로, 사진의 추상화, 비현실화라 할 수도 있다. 

사진의 추상화란 무슨 뜻일까? 눈으로는 보이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시각화한 경우, 또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전혀 현실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시각화한 경우로, 이들 사진의 의미는 현실적 의미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적 사고나 감각에 호소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사진 자체가 실은 시간이 정지된 추상적 매체임을 인정해야 하지만 현대사진은 이렇게 현실적 시간이 애초에 들어설 수 없는 사진적 특성의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 독자적 미학을 찾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로, 탈정르의 복합적 영상의 범람. 

현대로 접어들면서 사진가들은 순수한 사진의 울타리 안에서의 평화를 거부하고 나섰다. 가능한 모든 매체와의 교류를 통한 복합적 영상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사진이 기록에서 벗어나 자기 표현매체로 향했을 때 이는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자유분방하고 심오한 예술가의 내면을 형상화하기에 사진 고유한 형식미는 너무나 단조롭고 제약을 많이 받는다. 다른 예술 매체라고 해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제약이 없고 벽이 없는 매체는 없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만큼 작가를 옥죄는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 현대사진은 회화성까지를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향해 문을 열어 놓고 있다. 특히 근대사진의 중심 사진가들이 보면 놀랄 정도로 회화와 밀착된 사진을 이제는 흔히 볼 수가 있다.

 

여섯번째로 표현 방법의 다양화.

기록수단에서 표현매체로의 사진 인식의 전환은 결국 사진 중심축의 이동을 뜻한다. 중심축이 바뀐 상황에서 그 주변부의 변화가 혁명적이라 해서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영상의 왜곡은 차치하고 영상 자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오늘날의 사진 현실인 것이다. 사진의 순수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쪽에서 볼 때 이것은 타락의 한 현상일 수도 있다. 현대사진 인식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좁은 울타리 안에 자신을 묶어 놓는 소승적 사진관으로 치부한다. 사진이 반드시 기록에만 묶여 있어야 제구실을 다하는 것이 아니며, 기록 이외의 무한한 가능성을 기록 때문에 무시한다는 것은 마치 금광에서는 금만 캐어야지 아무리 양질의 은이 무한적 매장되어 있어도 거기에는 손도 대지 않는 어리석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작품이 갖추어야 할 조건의 하나에, 수용자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점이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적용하여 새로움을 추구하는 노력을 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것은 그럼으로써 새로운 작품이 나오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어 삶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경험이 새로운 형식미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은 전적으로 주제의식에서 온다. 주제가 새로울 때 형식미 또한 그에 따라 새로워지는 것이고, 설혹 형식미에 새로움이 부족하다 해도 주제에 새로운 의식만 담겨 있으면 그것은 새로운 경험으로 수용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형식미가 아무리 새로워도 주제의식이 낡은 것일 때 그것은 한낱 의미 없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신기함이 사라지면 작품의 생명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반대로 스트레이트 사진의 형식미는 발명 이후 지금까지 변한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낡은 형식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으며, 역사를 초월해 전해져 온 걸작의 대부분은 이 스트레이트 사진의 전통적 형식미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Alfred Stieglitz

 

 

무엇보다도 모든 예술은 그 추구하는 방법은 달라도 그 목표는 언제나 같은 것이다.속된 표현으로 '진리' 추구에서 모든 학문이나 예술이, 그리고 종교가 다 같지만 그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이 장르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고, 그 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정의나 가치, 의미 등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뿐이지 '진리' 추구하는 면에서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요컨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남는 것은 작품의 질이지 그 유형이 아닌 것이다. 현대사진의 현대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주제의식의 문제이지 표현 형식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전통적 형식의 사진, 스트레이트 사진도 현대사진의 중심적 사진이지만, 주제의식에서 현대적 특성이 보이지 않는 사진, 소위 근대사진적 사진이 오늘날 제작된다고 해도 작가의 진지한 문제의식만 돋보인다면 그것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서 문화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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