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글잭슨에서 데리다까지

2021. 4. 29. 11:44review

 

 

박정자의 디지털 노마드 강의 「마이클잭슨에서 데리다까지」, 기파랑, 박정자

 

 

소쉬르의 구조언어학 >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으로 발전

 

1. 소리(발음)로서의 책, 청각이미지

2. 문자(텍스트)로서의 책, 시각이미지

3. 개념으로서의 책, 의미

청각과 시각이미지는 시니피앙 signifiant(기표), 단어의 의미 또는 개념은 시니피에 signfie(기의)

 

 

p22 마이클 잭슨

자연은 예술처럼 보일 때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리는 자연이건 인공물이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이건 예술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반대로 예술은 또 자연처럼 보일때만 아름답다. 비록 그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다하더라도 마치 그것이 아무런 규칙도 없다는 듯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있다는 듯이 자연스러울때, 그 대상은 우리의 탄성을 자아낸다.

 

의도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예술작품이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훈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겉보기에 편안한 자연스러움과는 달리 그 뒤에는 규칙에 대한 엄격한 복종이 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사실은 엄격한 규칙에의 복종인데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러움'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고통의 흔적이 보여서는 안된다. 힘들게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일단 눈에 보이면 우리는 안쓰러움을 느낄 뿐 쾌감을 느낄 수 없다.

 

[그럼 부자연스러움은 아름답지 않는가. 부자연스러움 속에 억지스러운 연출이 아니라면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수가 있다. 사진, 회화, 조각 등에서 보이는 예술성의 이면에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데 그 자연스러움을 위해 무수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은 일상에서 보는 그런 자연스러움은 아닐것이다. 내가 느끼고 있던 어떤 감정이 표출되어 만났을때 우리는 '와~!'하고 동요한다. ]

 

마이클잭슨과 아버지의 관계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프로이트는 '친부살해'의 충동을 인간의 원초적 본능으로 보고, 이것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할 때 정산적인 성인이 되지 못하고 신경증의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카프카 등이 모두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작가들이다. '친부살해'의 욕구를 정상적으로 해소하지 못하여 간질이나 신경증의 단계에까지 이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억압된 욕구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불멸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아버지와 아들 그 누구도 잘못은 없고, 다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문제인지 모른다.

 

[부자관계, 즉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의 대상으로서 놓으면 갈들은 더욱 심각해진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모방은 아들의 유년기에 시작되고, 성장하면서 더욱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 모방욕구에 벗어나려는 노력이 갈등해소, 긴장완화의 첫걸음이 아닐까.  수천년 전부터 인류와 함께 존재해온 이 친부살해의 욕구는 어느 가정에나 존재하는데 모방대상으로서 차이가 소멸하는 순간  그 욕구는 힘을 잃는다.  어느순간 노쇠해버린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 모방욕구는 사라지는 것처럼 ]

 

 

 

p54  숭고에 대하여

두려운 자연 현상 앞에서 혹은 거대한 인공물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감, 이것이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거대함과 압도적 힘은 '수학적 숭고'와 '역동적 숭고'로 체험된다.  수학적 숭고는 무한한 절대적 크기의 관념에서 나오고, 역동적 숭고는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경외감에서 나온다. <칸트, 판단력 비판 25절> 일순 억눌렸던 감정이 그 억눌림의 반동으로 더욱 강렬하게 튀어 오르는 희열감을 느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숭고의 감정을 느낀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감동이란 순간적인 억압감과 그에 뒤따르는 보다 강렬한 생명력의 표출이기 때문이다.숭고는 불쾌와 고통의 감정이 일순간에 쾌감으로 바뀌는 쾌와 불쾌의 혼합이다.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은 칸트 미학의 양대요소이다.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미가 오성( 悟性, understanding)과 관련이 있는 반면, 숭고는 이성(理性)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영어로 오성의 의미는 이해라기보다는 표상에 가깝다. 표상은 '지각에 기초하여 의식에 나타나는 대상의 상像'을 말한다. 우리는 지각의 대상이 우리 눈앞에 실제로 있을 때 그것을 현전(presence)이라고 하고, 대상이 눈앞에 있지 않고 기억에 의해 그 상이 의식 속에 재생되는 경우를 표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 눈앞에 있는 책상은 현전이요, 여행을 떠나 여행지에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책상의 모습은 표상이다. 관념과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한다.

 

숭고는 이와 전혀 다른 감정이다. 숭고의 감정은 상상이 하나의 대상을 제시하는데 실패할 때 일어난다. 오성이 더이상 적절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주체는 인식의 또 다른 축인 이성에 의존한다.

 

[정리하면, 칸트의 미학이론은 두가지 단계로 진행한다. 먼저 구상력(상상력)과 오성 사이의 자유로운 유희의 조화로서 대상을 관찰한다. 우리는 미적대상을 볼 대 상상력이 보내준 데이터를 가지고 하나의 표상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구상력과 오성의 유희) 그리고 구상력과 오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숭고의 감정이 생겨난다.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때 적절한 표현할 말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뭐라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p89 키치의 문화

키치란 가짜인것, 저급한 것, 진품을 베낀 복제품, 몰취미하고 경박한 것, 대중의 취미에 맞춘 촌스럽고 번지르르한 것, 쓸데없고 가치 없는 것,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 요컨대 모든 실용과 상관없는 장식성이다.

19세기 성장한 부르주아는 귀족의 생활 방식을 따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으나 대부분의 시민들(쁘띠 부르주아)은 경제적 여력(고가의 보석, 의상, 실내장식품을 구매할 여력)이 없었다. 여기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모조품이다.

여기서 전통사회에서 사물은 기본적으로 사용가치에 의해(즉, 용도와 효용성에 의해) 가치가 정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물은 단순히 사용가치만을 갖지 않느다. 효용성의 기능 외에 새로운 의미가 효용성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이주해온 농부출신 프롤레타리아와 소부르주아(쁘띠 부르주아)는 좀더 도회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추구하였고, 사회가 자산들이 소비하기에 적당한 문화를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대중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생겨난 대용문화가 바로 키치다.

 

[우리는 좁은의미의 문화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그 어떤것이라 정의한다. 옛날의 음식문화, 공중도덕 등에서부터 젖가락, 포크 사용법, 독서하기, 음악듣기, 명상하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키치 역시 세련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욕구중 일부는 고급스러움과 세련됨의 본질은 주체의 양심에 기대기 보다는 주체가 상실된 보여주기에 초점이 이동된 듯하다. SNS의 범람은 이런 현상의 적절한 예라 보여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와 상업주의의 만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문화의 상업화는 왠지 세련되고 고급스럽지 않다. 즉, 그 가치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항상 문화는 앞서고 그 뒤에 상업주의가 바짝 쫓아간다. ]

 

키치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마저 허물면서 현대 사회 전체를 키치의 사회로 만들고 있다. 이제 키치는 하나의 보편문화, 즉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최초의 세계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키치는 1900년 이후 미학적 영역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팝아트의 시대가 도래하자 하나의 오락예술로 간주되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급은 키치적 예술이 대세이다.

 

[귀족문화, 형이상학적 문화를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상 속으로 스며든 것은 키치문화의 긍정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그런 문화를 제대로 소비하는데 아직 성숙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자칫하면   (그리고 흔하게) 삼류수준의 쓰레기문화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환경을 훼손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왜곡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작가는 그것을 키치의 비참이라고 표현한다. 문화의 가치는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p115  사진과 아우라

아우라란 무엇인가? 아우라는 본래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기운같은 것을 뜻하는 말인데, 1936년 발터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독특한 예술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벤야민은 아우라는 원본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사진이나 영화같이 복제되는 작품에서는 아우라고 생길수 없다고 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을 '아우라의 붕괴'로 정의하였다.  한 특정의 공간과 시간이 만나는 지점의 미묘한 아우라를 관찰자의 아득한 시선에서 찾았다. 복제될 수도 없고 나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이 감정이 바로 아우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중점적으로 아우라를 분석한 것은 사진에서이다.

초창기 사진은 기술적인 문제로 대상이 오랜시간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당시의 사진속 인물들의얼굴에는 침묵이 서려 있었고, 눈길은 그 침묵 속에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렇게 부동자세로 있게 했던 촬영방식 자체에서 아우라가 발생했다. 초기의 사진들은 모든 것이 지속성permanence이다. 초창기 사진의 아우라는 이런 지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진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진의 지속성은 사라지고, 찰나성transittoriness이 들어섰다. 아우라의 일회성uniqueness은 반복적 복제가능성reproducibility으로 바뀌었다.

 

[벤야민이 불특정 시공간에서 순간적(찰나적, 일회적)으로 느꼈던 아우라를 사진에서 분석하기 시작한 과정이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진과 영화과 아우라는 붕괴시킨 기술복제시대의 대표적인 수단인데 벤야민은 사진에서 아우라 현상을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우라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기운에 더해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나 배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관찰자 자신이 받아들이게 되는 에너지 같은 것으로 말이다.] 

 

 

p146  시뮬라르크 시대

근대 이전에 이미지는 현실의 반영이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이미지는 현실을 감추고 변질시켰다. 곧 이어 이미지는 아예 현실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원본의 시대에서 이미지의 시대로, 다음에 기술복제 시대, 그리고 제3세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 모던 시대인 오늘날 복제는 원본을 대신한다. 본 행사가 원본이라면 리허설은 복제인데, 그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여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된 시대이다. 한 사람의 배우, 한 사람의 정치인의 이미지는 실제 인물이라는 원본을 복사한 복제에 불과한데, 지금은 아예 복제만이 중요하고, 원본 같은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현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사라져 버렸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 그것이 바로 하이퍼 리얼리티 hyper-reality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TV리얼리티 쇼야 말로 하이퍼 리얼리티의 전형이다.

 

[요즘 유행하는 '부캐'현상은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고 더 나아가 복제와 원본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파악하고 키워나가고자 했던 기존 세대의 관념은 이제 심심하고, 재미없다. 정체성의 다양화? 멀티페르소나의 유행이 도래한 것이다. 두개의 직업을 갖기도 하고, 또한 나를 포함해 두 개 이상의 계정을 갖고 SNS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 계정의 통합을 거부한다. 내제적, 사적으로만 존재했던 다중인격이 현실세계로 당당하게 등장한 시대인 것이다. 나도 나고, 부캐도 나이다. 그리고 현실과 이미지의 세계 모두를 아우르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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