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1. 11:41ㆍreview
에로스의 눈물, 조르주 바타이유, 문학과 의식

[사피엔스 sapiens 라는 단어는 형용사이다. '인식능력을 지닌'이란 의미이다. 사피엔스의 출현은 약3만년전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 인간의 출현이었다. 이때가 후기 구석기 시대이다. 그러나 조르주는 '별로 합당치'않다고 말한다. 이미 그이전부터 호모과에 속한 원시인류는 도구를 사용하였고, 죽음에 대하여 인식하였다. 즉,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서 두려움과 사후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르주에 따르면 의식하에 쾌감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동물적 본성이라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의식적 행위의 한 단면이고, 이것이 바로 동물들과 구분하는 특징인 것이다.
조르주는 역사유적이나 유물에서 발견되는 이들 호모사피엔스의 미적수준에 감동한다. 그는 후기 구석기 인간의 에로틱한 삶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드는 본질적인 부분임에 집중하였다. 에로스의 눈물에서 조르주는 에로티즘의 탄생, 에로티즘의 역사 두개로 나뉘어 서술한다. 탄생과 역사를 통해 성, 죽음, 종교가 단일성을 지닌 것이라는 근본적 진리에 접근하고자 있다. 책에 제시된 엄청난 양의 회화는 정확하게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 에로티즘은 인간이 의식을 동반한 행위로서 번식을 위한 생식행위와 구분되며, 이로서 인간이 동물과 구분된다.
- 인간은 어느순간(아마도 선사시대인 약 3만년전)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였고, 죽음과 성적행위 사이에 공통된 반응, 상호작용이 따른다.
- 인류 역사의 처음으로 거슬러 가면 노동과 관련된 것들이 있다. 노동, 즉 도구의 사용은 동물이 인간이 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에로티즘과 동일하게 해석(목적의 의식적 추구)된다. 그러나 노동은 획득과 축적의 욕망인 반면, 에로티즘은 상실(작은죽음)을 수반한다.
- 전쟁, 노예제도, 부의 획득, 계층의 발생, 매춘 등은 물질 문명을 퇴보시켰다.
- 에로티즘의 바탕인 성적행동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금기의 대상이 된다. 금기의 대상은 유혹의 대상이 되고 동시에 신성한 섬광으로 비춘다.
- 에로티즘은 가장 감동적인 현상이며 동시에 가장 천박한 현실이다. 이러한 모순적 양상의 심층은 종교적이고, 공포스러우며, 비극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이다. 신성한 것인 만큼 더욱 그렇다.
- 이러한 금기의 대상인 에로티즘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광기와 신성, 격정적 황홀로 이어진다.
- 기독교와 중세시대에 오면서 에로티즘은 징벌, 악마의 유희로 전락되고, 마니에리즘 회화에서 재등장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르주가 쓴 소설 「눈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당히 거북스럽고 불편함을 지울수 없었다. 이성의 이면에 가려진 동물적 본성에 성과 죽음이 연결되는 통로가 자리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어떻게 에로스적인 황홀함을 수반한다는 것일까. 혹은 공포에 대한 감정을 이해(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이 에로티즘의 심연으로 빠지며 가능한 것일까.]
"죽음 혹은 죽음의 인식과 에로티즘의 일치를 분명히 그리고 변별적으로 식별해낸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이다. 원칙적으로 볼 때 고조된 성적욕망은 그 욕망의 결과인 생명과 대립적인 것일 수 없다. 에로틱한 순간은 심지어 이 생명의 절정이거니와, 그 가장 큰 힘과 그 가장 큰 밀도는 두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하나로 결합되며, 그리하여 영속화되는 순간에 드러난다. 문제는 생명이다. 문제는 생명을 생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생식할 때 생명은 범람한다. 그리고 생명은 범람하면서 극도의 착란에 이른다. 넘치는 관능 속에서 몸부림치며, 황홀하게 의식을 읽고, 마침내 심연으로 빠져드는 이 뒤섞인 육체들은 훗날 그들을 소리없는 부패에 갖다바칠 그 죽음의 반대쪽으로 향하는 듯 보인다.
과여 외견상 누구에게나 에로티즘은 탄생, 즉 죽음의 참화를 끝없이 보상하는 생식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동물, 심지어 가끔 관능이 극도로 고조되는 원숭이조차 에로티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에로티즘을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죽음의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극단적 차원의 에로티즘, 필사적 차원의 에로티즘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며, 우리기 죽음의 암울한 전망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p28)
"성적 활동의 목적을 의식한 최초의 인간들에게 있어 그 목적은 아기들의 탄생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요는 성적활동으로부터 비롯되는 즉각적 쾌감이었다. 출산은 일단 의식적 목적은 아니었다. 성적 결합의 순간이 의식적 의도에 인간적으로 일치하게 되었을때, 처음부터 그 목적은 쾌감, 강렬하고 밀도 높은 쾌락이었다. 의식의 범주내에서 성적 활동은 우선 관능적 흥분의 계산된 추구에 일치했다. -중략- 에로티즘의 결과가 아기의 탄생가능성과 무관하게 욕망의 관점에서 고려될 때, '작은 죽음'이라는 역설적으로 타당한 저 표현이 뜻하는 것은 다름아닌 상실이다.
과연 죽음의 인식을 계기로 동물로부터 구분된 인간은 에로티즘이 육체기관의 맹목적 본능을 의도적 유희, 하나의 계산, 즉 쾌락의 계산으로 대체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동물로부터 멀어진다."
에로티즘의 바탕은 성적 행동이다. 그렇지만 이 행동은 금기의 철퇴를 맞는다.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일인가!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것이 '금기'라니! 그것을 은밀하게 하지 않는 한 말이다.
금기는 금지된 행동이 그 자체로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어떤 의미를 금기의 대상에 부여한다. 금기는 위반을 자극하거니와, 위반이 없었다면 금지된 행동은 유혹의 사악한 섬광을 지니지 못했으리라,,,,,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금기의 위반인 것이다.,,,,, (p63)
종교적 금기는 원칙적으로 소정의 행위를 멀리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멀리하는 그 행위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다. 때론 금기를 침범하고 위반하는 일이 가능하고, 심지어 처방되기까지 한다. 결국 금기는 무엇보다 그것이 거부하는 대상의 가치-원칙적으로 위험한 가치-를 필요로 한다. 이 가치는 축제에서 재발견되는데, 축제의 시간에는 평소에 배제되던 것이 허용되고, 심지어 요구되기까지 한다. 축제의 시간동안 축제에 경이로운 색체, 신성한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다름아닌 위반이다. 제신들 중에서 디오니소스는 본질적으로 축제에 연결되어 있다. 디오니소스는 축제의 신이요, 종교적 위반의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취한 신이며, 광기를 자신의 신성한 본질로 가진 신이다. 하지만 애초에 광기 그 자체가 신성의 본질 아니던가. 이를테면, 여기, 이성의 법칙을 아우르는 신성 말이다. (p69)
종교의 에로티즘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은 종교를 한낱 공리주의 윤리로 축소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에로티즘은 그 신성한 성격을 상실함으로써 마침내 불결한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에로티즘의 역사에 있어 기독교는 이런 역할을 했다. 그독교는 에로티즘에 대한 징벌 그 자체였다. 기독교가 세계의 율법을 정초하는 한, 기독교는 세계를 에로티즘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노력했다. 기독교는 대체로 노농의 세계에 호의적이었다. 기독교는 쾌락을 희생시키고 노동에 가치를 부여했다. (p80)
중세는 회화의 영역에서 에로즘에 그 나름의 자리를 부여했는데, 그 자리란 다름아닌 지옥이었다. 이 시대의 화가들은 교회를 위해서 일했다. 그리고 교회의 눈에 에로티즘은 죄악이었다. 당시의 회화는 오직 징벌적 양상 하에서만 에로티즘을 도입할 수 있었다. 오직 지옥의 표현만이 - 엄밀히 말하자면 죄악의 협오스러운 이미지만이 - 에로티즘에 하나의 자리를 부여하게끔 했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알브레이크 뒤러(Albrecht Durer),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혹은 발둥 그린(Baldung Grien)의 작품들은 여전히 이 빛의 불확실성에 반응하고 있다. (p87)
노동이 폭력을 회피해 가는 것에 발맞추어, 노동은 자신의 맹목적 난폭의 시대에 상실한 것을 의식적으로 획득해 간다. 특히 회화는 조금씩 조금씩 이 새로운 지향성의 충실한 반영물로 자리매김된다. 회화는 이상주의의 침체를 벗어난다. 정말한 현실세계 앞에서 취하는 자유로움을 통해서 회화가 와해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상주의다. 어떤 의미에서 에로티즘은 노동에 대립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 대립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오늘날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물질적 쾌락이 아니다. 물질적 쾌락은 원칙적으로 부의 증식에 대립된다. 그리고 부의 증식 또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물질적 쾌락에-적어도 부분적으로는-대립된다. 부의 증식은 전쟁이 그 유일한 해결책인 과잉생산에 이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에로티즘이 무분별한 부의 증식의 산물로서의 전화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전쟁에 반대되는 여러 다양한 소비의 가능성, 즉, 에로틱한 쾌락-순간적인 에너지의 소비-이 그 전형인 여러 다양한 소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성에 바탕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 (p168)
우릭 한계 없는 광란에, 가공할 만한 주재에 계산을 대립시킬 때, 앞서 말한 쇠퇴의 느낌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 가능한 부(副)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마치 복수(復讐)-차게 먹는 그 요리-처럼, 부에 대한 우리의 눈먼 그러나 분명한 인식은 폭력의 완화와 정열의 상대적 차가움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오직 두 번 만에야 그들의 가능태의 끝에 이른다. 첫번째는 광란의 시간이고, 두번째는 의식의 시간이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 속에서 읽고 있는 것을 평가하기도 해야 하지만, 또한 애초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인간성에 상응하여 의식의 빛이 냉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의식과 관련이 있는 그 불가피한 쇠퇴를 측정한다.....
다음의 원칙은 여전히 진실이다 : 우리는 인간성과 의식 사이에 차이를 볼 수 없다....
의식적인 것이 아닌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필연적 관계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파란만장한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인간적으로 살 수 있다 : 오직 시간의 덩어리만이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완성한다. 의식은 애당초 깨어지기 쉬운 것이다. - 열정의 폭력 때문에, 의식은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열정의 소강상태 덕문에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폭력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소강상태를 우습게 여길 수 없다. (p190)
성, 죽음, 종교적 제의와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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