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2021. 5. 1. 17:34review

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 현대지성


"네가 비탄에 잠겨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때 이미 나는 네가 억울하게 유배 온 자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밣히기 전에는, 네가 살던 땅에서 얼마나 멀리 유배를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마 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네 본향을 떠나서 이렇게 멀리까지 유배를 온 것이라기보다는, 네 자신이 너의 본향을 떠나서 이렇게 멀리까지 유배를 온 것이라기보다는, 네 자신이 너의 본향을 떠나 이 머나먼 곳에서 바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네가 강제로 유배되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고집한다면, 너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네 자신 때문에 유배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유배될 수 없고, 따라서 너를 유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중략- 너의 유배생활이나 이곳에서의 너의 처지와 형편 같은 것들은 내 마음을 괴롭게 하지도 않고 나로 하여금 신경 쓰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상아와 유리로 장식된 어의 서재라는 성채가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는 안식처이다. 거기에다 나는 책들을 잔뜩 쌓아둔 것이 아니라, 유형의 책들에 가치를 부여해 주는 무형의 사상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 철학의 여신



덧없는 기쁨도 버리고
두려움도 버리고
헛된 희망도 버려서
고통이 들어설 자리를 허용하지 말지니,
그런 것들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정신은 구름에 덮인 것처럼 몽롱해지고
영혼은 쇠사슬에 매이노니, - 제1권 제7장 보에티우스의 상태

[ 제1권(1장에서 7장)은 철학이 보에티우스 병의 성격을 진단하는 것이 주제이다. 진단하는 주체는 철학의 여신이다. 보에티우스가 절망에 빠져 있는 동안 노래로 위안을 주는 시의 여신들이 등장하지만 철학은 이들을 쫓아내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보에티우스를 질책한다. 여기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보에티우스가 자신이 고통속의 삶중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 철학이었음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에티우스는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또한 악인이 잘되고 선한자가 고통받는 인간사회에 대한 불만과 신이 자연 세계에 부여한 질서가 인간사회에 미치지 않는 것을 한탄한다. 그러나 철학은 그가 잘못된 욕망에 굴복해 스스로 자신의 참된 본향으로부터 유배되는 일을 자초한 것이라 반박하면서 보에티우스가 앓고 있는 병의 진단과 치료의 방향을 정한다.]

"죽을 수 박에 없는 유한한 인간아, 도대체 무엇이 너를 비탄과 애곡 속으로 내던져 버린 것이냐? 너는 네게 익숙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낯선 것을 보아 왔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이 너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돌변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행동해 왔고, 그것은 그녀의 본성 자체이다. 따라서 그녀가 너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은 자신이 늘 해왔던 대로 한 것일 뿐이고, 따라서 자신의 본성을 충실히 따른 것일 뿐이다. 그녀가 네게 온각 미소를 지으며 온갖 거짓 행운으로 너를 유혹하여 혹하게 만들고 있던 그때에도, 이미 그녀는 자신의 본성을 따라 언제든지 너에 대한 태도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지 너는 이 눈먼 여신이 자신의 두 얼굴을 모두 네게 내보였을 때에야 비로서 그녀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일 뿐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자신의 한 쪽 얼굴만을 보이며 다른 쪽 얼굴을 감추고 있지만, 네게는 자산의 모든 면모를 남김없이 드러낸 것만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제2권 제1장 운명의 여신의 속성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인데,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너의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너의 복이고, 네가 얼마나 행복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너의 눈물을 그치라. 너에 대한 운명의 여신이 미움은 네게 주어진 모든 행복을 다 파괴할 정도로 극에 달한 것은 아니고, 네게 불어닥친 풍랑도 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너의 닻은 여전히 견고해서 현재에 있어서는 너의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미래에는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오, 언젠가는 죽게 될 인생들아, 행복은 너희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밖에서 찾는 것이냐. 너희는 무지와 오류로 인해서 착각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땅에서의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말해줄 것이다. 내가 너의에게 너희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너희는 그런 것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네가 네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면, 너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 즉 운명의 여신이라도 결코 네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 제2권 제4장 참된 행복

[ 철학은 운명(행운)의 여신이 지극히 변덕스럽고, 언제든지 태도를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운명의 여신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가 다시 가져가는 것은 자신의 권한이므로 그런 조치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변한다. 즉,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합법적인 권한과 힘을 사용할 뿐이고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참된 행복은 운명의 여신이 좌지우지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데 있음을 강조한다. 내가 행복하다고 여기거나 기억하는 것들, 나를 행복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주었던 것들은 돌이켜 보면 나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보석, 아름다운 풍경, 한껏 치장한 의복 등 재물이나 권력, 명성 같은 것들을 잃어버렷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것들을 갖고자 하는 욕망은 아무리 채워보아도 오히려 결핍은 더욱 커지게 될 뿐이다. 또한 고귀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비천한 것들로 치장하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

처녀지에 씨를 뿌리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땅에서 관목들을 뽑아내고
덤불과 잡초를 낫으로 베어냄으로써
대지의 여신이 와서 그 땅을 새 곡식으로
풍성하게 채울 수 있게 하는 법

입맛이 쓴 맛을 먼저 맛본다면
벌의 수고로 만들어진 꿀은 더 달콤하고,
남풍이 몰고 온 비바람이 그친 후에는
별들은 더욱 밝게 빛나며,
금성이 어둠을 거두어갔을 때에야
청명한 아침이 장밋빛 붉은 말들을 몰고 오나니.

지난날 거짓 행복을 좇았다면
이제라도 먼저 너의 목에서 멍에를 벗어버려야 할지니
그래야만 참된 행복이 너의 마음에 깃들리니. - 제3권 제1장 참된 행복 서론

"사람들이 그토록 천차만별의 시도와 노력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의 힘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추구는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이 모두 '선'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제3권 제2장 참된 행복의 정의



[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선하고 좋은것들 중의 최고는 행복이다. 즉 모든 인간은 행복이라는 최고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다만 그 행복에 도달하는 과정에 인간들은 수많은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며,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람마다 행복, 즉 선하고 좋은것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라 행복이라는 목적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재물, 높은 관직, 권력, 명예(명성),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이것을 통해 행복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 사람들 각자는 자기에게 좋은것이라는 생각에서 그것을 추구하고, 행복은 기장 좋은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물, 높은관직, 권력, 명예, 육신의 쾌락은 거짓행복에 불과하다고 보에티우스는 말한다. 거짓 행복을 쫓아 행복을 찾아서는 안되고 참된 행복을 찾으라는 것이다. ]

[ 사람은 모두 태어나면서 빈손으로 태어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태어나는 순간 신분, 부와 같은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능력인가 우연(운)인 것인가.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좋은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출발선에 선 다른이들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것의 기준을 바꾸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결핍을 느끼고,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꿔 나간다. 그것은 괴로움이라는 감정을 수반한다. 게다가 결핍은 제거되기는 커녕 끊임없이 확대, 반복된다.

관직에 관해서는 어떤가.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은 다른이들로부터 명예와 존경을 얻게 해 준다. 그래서 높은 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합지 않은 이들이 높은 관식에 오르는 경우를 매우 흔히 접한다. 적합치 않은 이들이란 그 관직에 맞지 않다, 즉 걸맞는 지혜와 미덕을 갖추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오히려 악한 자들이 높은 관직에 올라 악명을 떨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런 비열하고 추한 모습을 과거 뿐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매우 자주 목격한다. 미덕과 존경이 높은 관직으로 가는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대중들의 환호와 왜곡된 정보의 상호작용에 의해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는 부실하고, 그 자체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보에티우스는 말한다. 또한 악인은 그 높은 관직으로 인해 사람들 눈에 노출되어 더 많을 멸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높은 관직이 악인들을 존경받을 만하게 만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있는 악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어서 더 많은 멸시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인들은 자신들이 앉아 있던 높은 관직으로 인해 결국은 해악을 입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높은 관직에 수반되는 권위를 자신들의 추악함으로 더럽힘으로써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이렇게 높은 관직이라는 것이 사람을 존경받을 만하게 만들어 주지도 못하고, 악인들에 의해 그 권위가 쉽게 더럽혀지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평가나 생각에 의해 그 권위가 악화되거나 상실되기도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우리가 추구할 만한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고 할 수 없지 않느냐." 제3권 제4장 높은관직과 참된 행복



심오한 정신으로 진리를 찾고자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헤매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자신의 정신을
강제로라도 다시 되돌려서
자기자산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거기에 있는 내면의 빛을 보고,
밖에서 찾고자 했던 모든 것이
자신의 보물창고인 그곳에 감춰져 있음을
자신의 정신에게 가르쳐야 할지니,
오류의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던 것이 비로소 드러나
태양보다 더 밝은 밫으로 빛나리라.

육신이 정신을 짓눌러서 많은 것을 망각하게 하여도
내면의 모든 빛을 다 꺼버릴 수는 없으니,
진리의 씨앗이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 붙어 있다가
철학의 가르침의 산들바람에 다시 살아나리라.

진리의 불씨가 너희 마음속 깊은 곳에 살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너희가 스스로 질문하며 스스로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플라이 잘 말하였듯이,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망각했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제3권 제11장 단일성인 선

"사람들이 추구하는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는 선들은 하나의 단일성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과 단일성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단일성을 상실할 때 자신의 정체성도 상실하게 된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만물은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움직이는데, 오직 단일성을 유지할 때에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단일성인 선을 추구한다." 제3권 제11장 단일성인 선

"만물은 선을 추구한다. 우리는 이것을 만물이 원하는 것은 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창조된 것들을 계속해서 존재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름인 '신'이라고 부릅니다."
"신이 선이라는 키를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고 있고, 앞에서 이미 확인했듯이 만물이 자연의 작용에 의해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만물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성을 따라 그들을 다스리는 신에게 호응하여 자발적으로 그의 명령을 경청하고 복종하는 것임을 우리가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느냐"

"당신은 조금전에 행복에서 출발해서 행복은 최고선이라고 말씀한 후에, 최고선은 최고신 안에 있다고 말씀함으로써, 신 자신이 최고선이자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서, 사람이 신이 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게 일종의 작은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은 선이라는 저 동일한 형상이 신과 행복의 실체라고 말씀했고, 만물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저 단일성이 바로 선이라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는 신이 선이라는 키를 가지고 만유를 다스리고 있고, 만물은 신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악은 진정한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논증하셨습니다." 제3권 제12장 신과 만유

[ 철학은 말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의지와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한 것을 이루어내는 정도에 따라 힘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로 구분되어진다. 선한자들은 선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본성적인 기능인 미덕을 사용해서 최고선을 추구하는 반면, 악인들은 미덕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런저런 욕망들을 통해 최고선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본성적인 미덕의 힘을 이용하여 목표를 이루는 것은 힘있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악인들은 모든 힘이 결핍된 힘없는 자들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왜 악인들은 미덕을 버리고 악을 추구하는 것일까. 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가장 힘없는 자들이라는 말이 맞다. 무지로 인한 맹목보다 더 약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욕망이 그들을 사로잡아서 악으로 휘몰아가는 것인가. 이 경우에도 그들이 가장 힘없는 자들이라는 말이 맞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제력이 결핍되어 있는 자들이고, 악덕과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선이 무엇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단지 힘이 있기를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를 그치는 것이다. 만물의 공통적인 목적은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기 위해서 선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을 버리고 악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4권 제2장 참된 힘은 덕 있는 자들에게 있다.

선한 행위에는 반드시 선이라는 보상이 따른다. 선한 자들은 신성을 얻게 되는 상을 얻지만, 악인들은 악하게 되는 형벌을 자초한다. 이 형벌로 인해 악인들은 인간이하의 존재로 전락해서 짐승이 되고 만다.

[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선한자인지 악한자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있다. 선을 추구하지만 쉽게 악한 행동에 빠지는 경우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악한 행위를 희석하여 스스로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들이 흔히,,, 휩게 빠지는 오류이다. (이에 대해 보에티우스는 악을 선으로 착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본성인가 짐승의 본성인가. 우리는 신과 짐승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직 선만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고, 악은 인간의 본성을 빼앗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런식으로 인간의 본성을 상실한 자는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인간세상은 악한자들이 더 잘살고, 선한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가. 이런 불의와 부당함은 왜인가. 상대적으로 나는 다른 이들보다 선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나는 그들보다 불행한것인가. 이런 물음이 생기곤 한다. (내가 느끼는 불행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 척도에 따른 불행일뿐이지 불행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만물의 다양한 활동방식은 단일한 본성이라는 성채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 신의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만물의 이 다양한 활동방식은 완벽하게 순수한 신의 지성과 관련하여 고찰될 때에는 '섭리'라고 불리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이 다양한 활동방식을 그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들과 관련하여 고찰해서 '운명'이라고 불렀다. 섭리는 만물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 안에 자리 잡고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안배하는 신적인 이성 그 자체인 반면에, 운명은 섭리가 자신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서 그 변화들을 한데 묶어서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 나갈 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특정한 결과물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운명은 섭리에 의해 좌우된다. 운명의 질서는 단일한 섭리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만물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만물은 선을 지향하여 나아가도록 배치되어 있고, 안배되어 있다.

그러나 너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선한 자들에게도 좋은 일과 나쁜일이 일어나고 악한자들에게도 좋은일과 나쁜일이 일어나는데 이렇게 뒤죽박죽인 상황보다 더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 과연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아주 정확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어서, 선한 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선하다고 하고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악하다고 하느냐? 실제로는 사람들의 판단은 서로 달라서, 한 사람을 놓고서도 서로 의견이 갈려서 어떤 사람들은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시은 섭리라는 저 높은 망대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따라 모든 것을 안배한다. 이렇게 해서 섭리를 아는 신에 의해 이루어진 저 운명의 질서는 참으로 경이롭고 놀라운 것인데도, 섭리를 모르는 자들이 보면 의아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 제4권 제6장 신의 섭리와 운명 간의 관계

"온갖 운명은 선하다"

"즐거운 것이든 힘든 것이든 온갖 운명은 선한 자들에게는 상을 주거나 단련시키기 위한 것이고, 악한 자들에게는 벌을 주거나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서 정당하거나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선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용사가 전쟁터에서 적군의 함성소리를 들을 때마다 성가시다고 불평하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자는 운명과 싸움을 벌일 때마다 그 싸움이 힘들다고 불평하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이나 난관은 용사에게는 자신의 영광을 드높일 기회가 되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자신의 지혜를 갈고 닦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덕을 '비르투스(virtus)'라고 부르는 이유도 미덕의 힘(vires '비레스')에 의지하여 싸운다면 역경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진 일에 여러가지 원인들이 결합되어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연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원인들은 섭리와 거기에 따른 질서에 의해서 서로 만나고 결합된다. 즉, 섭리라는 원천에서 나온 질서가 섭리와의 필연적인 연결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섭리에 따라 고유한 장소와 시간에 안배할 때, 모든 원인들은 거기에 따라 모이고 흩어져서 서로 일정한 결합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신이 섭리에 따라 미래에 일어날 일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책에서 철학은 말한다. '신의 예지가 미래에 어떤 일들이 필연적으로 인어나게 만드는 원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일들이 미래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표지로서의 역할은 하게 될 것'이라고.]

어떤 일들이 어떤 필연성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도 미래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는 그런 일들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일어나는 일들이 존재한다. 나는 어떤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어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의 예지에도 불구하고 필연성에 의해 강제되지 않아서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었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그 일에 필연성을 부여해서 미래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의 관계는 오직 신의 본성과 지식을 이해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반면에, 신은 영원하다. 신은 항상 현재 속에서 변하지 않는 삶을 산다. 따라서 신의 지식은 시간의 세계를 초월한다. 신은 미래의 일들이 필연성에 의거해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일을 자신의 눈 앞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바라본다. (즉, 신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들의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서가 아니라 자신의 단일성에 의거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즉자적으로 본다. 모든 것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한 번에 즉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신의 예지의 본성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의 예지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의 기준이 되기는 하지만, 그 자신은 미래에 일어나게 될 그 어떤 일들로부터도 제한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신의 예지도 모든 것들의 본성 자체를 제한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필연성에 관한한, 신의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미래의 일들이 필연적이지만, 그 일들 자체만 놓고 볼 때에는 어떤 일들은 필연적이고 어떤 일들은 필연성에서 벗어나 있다. 자유의지의 주체가 자유롭게 자신의 결정을 바꾸는 것들도 섭리에 의한 예지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의지의 자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위들에대한 상벌, 미래의 복들을 구하는 신을 향한 기도는 모두 유효하다.

재5권 제6장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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